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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kitty is rockstar

수업이 있는 날이면 혼자 버스에서 내려 천천히 진입로를 걸어 올라가는 걸 좋아했지. 교문까지 1.5km나 되는 길, 다시 스쿨버스를 잡아타지 않으면 안 되는 꽤 긴 거리. 하지만 난 그 길을 걸어 다니는 것이 좋았어.

수업은 이미 시작된 지 오래고, 멀리서 희미하게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어.
여름의 대기는 종종 팽팽하게 잡아당겨져 있어서 피부가 떨리도록 긴장 되었고 하늘도 있었고, 휘핑크림 같은 적란운도 있었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기척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한낮의 신기한 적막도 있었어.
학교로 들어가는 발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커다란 느티나무 밑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그 따뜻한 바닥에 손을 대고 있으면 문득 참매미의 껍질이 만져지기도 했지.

곧 흙으로 돌아갈 매미의 껍질. 본체가 빠져나간 허물은 용케도 원래의 형상을 기억하고 있었어. 하지만 곧 그 메마른 껍질이 부서지는 걸 보고 있으면 이유 없이 사무치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그건 뭐랄까, 기이한 침잠과 순연한 인정과, 잠시의 나른함으로 이어지는 상형문자같은 감정이어서
끝내 해독할 수 없는 이미지만 남기고 흩어졌어.

*

그날의 시 창작 시간은 학교 뒤 숲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어서, 나는 사막 위를 건너온 건조한 바람처럼 바스락거리며 숲속으로 스며들었지. 어느새 발목은 조금 가벼워졌고, 입술은 더 촉촉해졌어.

모두들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어서
눈인사 뒤엔 종이 위를 지나가는 펜 소리만 들렸던 시 쓰는 시간.
너에게 닿기 위해선 산그늘이 내려앉은 호수를 헤매야 했는데 나는 벌써부터 마음을 들킨 것처럼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지.
물 위를 스치는 소금쟁이가 은밀한 중력을 감추려는 듯 그림자를 끌고 종종종 물 가운데로 파문을 그리며 사라지면 어느새 나는 너를 보고 있었어.
넌 가만히 턱을 괴고 호수를 보고 있더라. 모두 시 쓰기에 여념이 없는데,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니?

*

너를 보면서 난 중학교 때 보았던 한 아이를 떠올렸어.
거긴 개방식 도서관이었지. 내 맞은편에 바로 그 애가 앉아 있었어.
시험 기간이라서 모두들 자석처럼 웅크려 앉아 책 속에 고개를 묻고 있는데
그 애는 참으로 한가해 보였지.

책상 위엔 달랑 책 한 권과 연습장이 전부.
그리고 주변엔 온통 뭐가 있었는지 아니?
펜이 있었어. 무지개를 열 개는 그리고도 남을 것만 같은 펜이 말이야.
그 애는 펜이 얼마나 잘 나오나 시험이라도 하듯이 그 많은 펜을 찬란히 늘어놓고 하나씩 공책 위에 뭔가를 적고 있었어. 아마도 암기해야 할 중요한 내용인 것 같았는데, 실상은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펜을 바꾸어 가면서 말이야. 예쁘게 뭔가를 적고, 정리하는 것 그 자체를 즐기는 것 같은 태도였어.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고 말았지. 그때 느꼈던 아름다움을, 너에게 다시 느끼고 있었지. 그걸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 호수를 바라보며 가끔 눈을 감기도 하고, 붉은 뺨을 바람에 내맡기는 것처럼 15도 정도 고개를 살짝 기울이기도 하고, 시라는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는 듯, 그랬던 너.
그리고 너를 바라보고 있었던 나.
내가 그때 무지개를 열 개는 그리고도 남을 것만 같은 펜으로 마음속에서 너의 이름을 계속 쓰고 있었다는 걸 너는 알고 있었을까?

그날 너의 손을 잡고, 아이들의 눈을 피해 숲속으로 난 길을 빙빙 돌아 버스를 잡아탔을 때까지 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어.
아주 잠시 네 손에서 풍겨 나오던 기분 좋은 핸드크림 냄새를 맡았던 것뿐이었지.

*

내가 보았던 것은 그저 오후 두시의 햇빛과 열린 창틈으로 날아 들어오던 하얀 꽃가루와 작은 연기가 피어오르던 비탈길에 가득한 눈부신 여름빛뿐이었는데 몇 번 사람이 탔다가 내리고, 기어이 뒷좌석에 앉은 우리 둘만이 승객으로 남았을 때, 그대로 버스가 영원히 달려갈 것만 같았던 그 순간,
너라는 세계에 내가 닿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
그런데 정말 무슨 힘이었을까, 말없이 창밖만 내다보고있던 네가 가방을 열고 무언가를 꺼냈지. 그래, 그건 캔디였어. 탄생석이 가득한 보석함을 열 때처럼 반짝이며열린 상자. 그 안에서 꺼내주던 후르츠 캔디. 우리 둘은 여전히 말없이. 하지만 나란히 캔디를 입에 넣고 그 길을 달려갔지.

버스 안은 달콤한 향기로 가득 차고, 점점 행복해지고.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니? 아름다워. 이 아름다움을 어떻게 하지...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은데, 영원히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하지. 난 마치 우리들의 미래를 미리 보고 온 사람처럼 그때부터 이미 가슴이 아파오고 있었어.

*

아, 미안. 네가 들려준 말인데 이젠 내가 너에게 아는 척을 하고 있구나.
하지만 오늘은 좀 더 계속하도록 허락해주지 않을래?
이제 이런 얘기, 어디에도 하지 않을래.
오늘을 끝으로 캔디 상자는 영원히 닫아두기로 했거든.
그렇지 않으면 이 향기가 모두 날아가 버릴 것 같아.

*

그때 우리가 호숫가에서 그 시간 내내 시를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참 바보같은 생각이지? 어쩌면 난 그때 못 쓴 시를 지금 이렇게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나만 여전히 나머지 공부를 하는 기분이야

넌 여전히 눈을 감고 호수의 바람을 흠향하고 있고
그런데 써도써도 그날의 아름다움을 그려낼 수 없으니
어쩌면 좋을까 내가 가진 펜으로는 그려낼 수 없으니 어쩌면 좋을까
미안, 이제 정말 네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아

| 박상수, 후르츠 캔디 버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