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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긴 인생을 틀린 맞춤법으로 살아왔고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 삶이 시계라면 나는 바늘을 부러뜨릴 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하염없이 얼음을 지칠 테다 지칠 때까지 지치고 밥을 먹을 테다 한 그릇이 부족하면 두 그릇을 먹는다 해가 떠오른다 꽃이 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 | 이제니, 밤의 공벌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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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 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 마. 잠 못이루지 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믿지 마. | 한강, 밝아지기 전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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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죽고싶어요, 죽고 싶어요 너는 날마다 아름다워지는구나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최소한 자퇴라도 해야겠어요 해야겠어요 넌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게 있으니 정말 아름답구나 급식 지도 선생님이 운동장 한 가운데를 지나간다 선생님, 그래도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처음부터 다시 다시 다시 아무런 희망이 없어요 없다구요 너무 오래 살았나 봐요 살았나 봐요 운동장에 급식 지도 선생님이 지나간 길이 선명하다 잘못했어요 뭐든 다 잘못했어요 이 베개만은 가져가지 마세요 그게 베개였구나 근데 얘, 헤어롤 떨어지겠다 다시 말아 봐 선생님, 그게 아니구요 사는 게 왜 이래요 날마다 벼랑이고 끝 같아요 끝 같은게 아니고 끝이어서 아름답구나 그 끝을 그렇게 발랄하게 넘어갈 수 있으니 그런 슬픔을 가져 본 적 없구나 | 이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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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있는 날이면 혼자 버스에서 내려 천천히 진입로를 걸어 올라가는 걸 좋아했지. 교문까지 1.5km나 되는 길, 다시 스쿨버스를 잡아타지 않으면 안 되는 꽤 긴 거리. 하지만 난 그 길을 걸어 다니는 것이 좋았어. 수업은 이미 시작된 지 오래고, 멀리서 희미하게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어. 여름의 대기는 종종 팽팽하게 잡아당겨져 있어서 피부가 떨리도록 긴장 되었고 하늘도 있었고, 휘핑크림 같은 적란운도 있었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기척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한낮의 신기한 적막도 있었어. 학교로 들어가는 발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커다란 느티나무 밑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그 따뜻한 바닥에 손을 대고 있으면 문득 참매미의 껍질이 만져지기도 했지. 곧 흙으로 돌아갈 매미의 껍질. 본체가 빠져나간 허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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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개천쪽으로 문이 난 납작한집들이 개딱지처럼 따닥따닥 붙어있는 동네에서 자랐다. 그 동네에선 누구나 그렇듯 그 애와 나도 가난했다. 물론 다른 점도 있었다. 내 아버지는 번번히 월급이 밀리는 시원찮은 회사의 영업사원이었다. 그 애의 아버지는 한쪽 안구에 개눈을 박아넣고 지하철에서 구걸을 했다. 내 어머니는 방 한가운데 산처럼 쌓아놓은 개구리 인형에 눈을 박았다. 그 애의 어머니는 청계천 골목에서 커피도 팔고 박카스도 팔고 이따금 곱창집 뒷 방에서 몸도 팔았다. 우리집은 네 가족이 방 두개짜리 전세금에 쩔쩔맸고, 그 애는 화장실 옆 천막을 치고 아궁이를 걸어 간이부엌을 만든 하코방에서 살았다. 나는 어린이날 탕수육을 못 먹고 짜장면만 먹는다고 울었고, 그 애는 엄마가 외박하는 밤이면 아버지의 허리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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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중간에서 내리라는 요구를 당한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하늘 한가운데잖아요? 여기서 내리면 나는 죽잖아요? | 김사과, 천국에서 中